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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 빛이 감은 눈을 아프게 때리고 형체가 없었던 몸이 무게를 가지고 급작스럽게 가라앉는다. 몸에 걸친 옷의 감촉, 발끝에 지면이 닿는 감각, 단도실 안의 불기가 낯설게, 그러나 더없이 익숙하게 와 닿았다. 벚꽃 잎과 함께 검은 스커트 자락이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현현 후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터진 빛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의 주인이었다. "미다레 토시로야. 저기, 나랑 흐트러지고 싶은 거야?" 갓 현현한 미다레 토시로는 애교를 한껏 섞어 사니와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입꼬리가 풀리고 눈매가 부드러워진다. 반가운 미소 외에 다른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범한 반응에 미다레 토시로는 입을 비쭉 내밀며 치, 재미없게. 하고 짧게 투덜거렸다. "미다레 토시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
"부탁입니다, 정화하게 해 주세요." 작고 마른 형체가 코우세츠의 가사 자락을 붙잡았다. 코우세츠는 단호히 그것을 뿌리쳤다. 간단한 발길질만으로 저만치 나가떨어진 사니와는, 엉금엉금 기어 다시 코우세츠의 가사를 붙잡았다. 사니와의 손을 타고 옷자락에 재액이 묻는다. 영력이 타올라오듯이 재액이 옷자락 사이사이에 배어 코우세츠를 더럽힌다. 코우세츠는 사니와를 다시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사니와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얼굴을 든 사니와가 배시시 웃었다. 안구가 없는 한쪽 눈에서 피와 고름과 재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창백하고 마른 손이 다시 코우세츠를 향해 뻗어 왔다. 손끝이 옷자락에 닿게 전에, 코우세츠는 사니와의 두 손을 단단히 마주잡았다. 사니와의 몸에 배어 있는 재..
물에 불어터진 상처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렀다. 사니와는 주먹으로 상처를 문질러 닦았다. 손등에 물과 섞인 피가 빨갛게 번졌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데도, 몸은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무거웠다. 입은 옷이 지나치게 무거운 탓일지도 모른다. 새로 갈아입은 기모노는 검고 두껍고 무거운 천으로 지어져 있었다. 옷감이 이토록 두꺼운 것은 사니와에게서 나는 살 썩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다리에 난 상처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 옷 밑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검은 옷감이 점점 붉게 물든다. 키사라기야. 미카즈키가 다정하게 어깨를 잡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않느냐. 그 다정한 목소리를 신호삼아 사니와는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손 대신 오른손을 정중하게 내려..
1.우리 집은 아주 낡은 저택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져 내려오는 집이라고 한다. 바람이 심한 날 집 안에 있다 보면 목재가 삐걱삐걱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조용한 밤 천장 위에서 무언가 들보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나는 어렸을 때 우리 집을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부르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내가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크게 나무라곤 했다. -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집이 낡았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돼요. 고용인들이 나를 혼내고, 친구들이 비웃어도 나는 꿋꿋이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표현을 고수했다. 다들 착각이라고 떠들던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으니까. 12살쯤 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키사라기..
남사들이 전부 원정을 나가고 난 혼마루는 무척 조용하고 평안했다. 낮잠 자기 좋게 햇살이 따스하고, 땀을 식히기 딱 좋은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그리고 이 좋은 날, 사니와는 욕실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야만바기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혼자 씻을 수 있다니까요!""팔 불편하잖아. 도와 줄게." 사니와의 필사적인 호소에도 야만바기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사니와는 빨개진 귀 끝을 하고 야만바기리의 표정을 살폈다. 이쯤 되면 마음대로 하라며 화를 내고 돌아갈 법도 한데, 그는 오늘따라 부드러운 눈으로 사니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만바기리가 사니와를 보며 고개를 모로 갸웃했다. "싫어?" 야만바기리와 눈이 마주친 사니와는 표정을 감추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야만바기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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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기분 좋게 무겁고, 몸에 배기는 장식과 두꺼운 옷 사이로 희미하게 기분좋은 체온이 느껴진다. 잠결에 저도 모르게 거기에 고개를 묻자 다른 손길이 부드럽게 사니와의 고개를 반대쪽으로 당겼다. 멍한 의식 사이로 조금 가시 돋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야스사다, 치사해!" "치사하긴 무슨." 고개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따뜻한 손바닥이 귀에 눌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티격대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깨겠다. 저리 가!" "너야말로 다른 데로 가." 이미 잠은 다 달아나 버린 후였다. 이대로 깼다는 기척을 내도 좋은 걸까. 사니와가 저도 모르게 긴장한 것을 알아챘는지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이 황급히 물러났다. 두 쌍의 시선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사니와는 멋쩍게 고개..
나키기츠네는 말이 없는 편이다. 대부분의 의사전달은 나키기츠네와 함께 다니는 여우가 하며, 나키기츠네 본인은 그 뒤에서 말을 듣는 사람을 지긋이 응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키기츠네와 사니와가 함께 있을 때도 늘 그렇다. 종알종알 떠드는 여우를 사니와가 미소를 띠고 쓰다듬는다. 드문드문 상처가 남은 손이 여우의 귀 뒤를 긁고 꼬리를 만지작거린다. 즐거운 듯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해서 나키기츠네가.... 주군님, 듣고 있사옵니까!""네. 듣고 있어요.""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전혀 듣고 계시지 않지 않사옵니까!" 여우가 사니와의 손을 쏙 빠져나가 나키기츠네에게로 되돌아갔다. 사니와가 아쉬운 듯이 여우에게로 손을 뻗었다가 거둔다. 그리고 나키기츠네는 죽 사니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음을 깨달은 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