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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레 토시로를 단도한 날 본문

明/뒷이야기

미다레 토시로를 단도한 날

김하임 2016. 3. 20. 13:46

1.
 흰 빛이 감은 눈을 아프게 때리고 형체가 없었던 몸이 무게를 가지고 급작스럽게 가라앉는다. 몸에 걸친 옷의 감촉, 발끝에 지면이 닿는 감각, 단도실 안의 불기가 낯설게, 그러나 더없이 익숙하게 와 닿았다. 벚꽃 잎과 함께 검은 스커트 자락이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현현 후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터진 빛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의 주인이었다.

 "미다레 토시로야. 저기, 나랑 흐트러지고 싶은 거야?"

 갓 현현한 미다레 토시로는 애교를 한껏 섞어 사니와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입꼬리가 풀리고 눈매가 부드러워진다. 반가운 미소 외에 다른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범한 반응에 미다레 토시로는 입을 비쭉 내밀며 치, 재미없게. 하고 짧게 투덜거렸다.

 "미다레 토시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아와타구치 요시미츠가 만든 단도야."
 "사니와 요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아, 재미 없어라."

 "네?"
 
 가볍게 던진 농담에 대번 당황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미다레는 당황하는 사니와를 향해 짓궂게 웃었다. 이번의 주인님과는 장난치기 좋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미다레는 사니와보다 한 발 앞서 단도실을 나왔다.


2.
 사니와는 미다레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혼마루를 안내해 주었다. 조금 복잡한 복도를 사니와가 앞서고 그 뒤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다레가 따랐다. 복도를 걷던 사니와와 미다레는 곧 푸른 눈의 도검남사와 맞닥뜨렸다. 양손에 빨랫감을 안은 호리카와가 사니와에게 먼저 인사했다. 어쩐 일로 사니와가 본채에 방문했는지 궁금해 하던 호리카와의 시선이 사니와의 뒤에서 고개를 쏙 내민 미다레와 마주쳤다. 호리카와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과, 약간의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호리카와가 살짝 몸을 낮추어 미다레와 눈을 맞추었다.

 "아, 신입 부원이군요. 안녕하세요?"
 "안녕, 미다레 토시로야."

 호리카와에게 인사를 건넨 미다레의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흰 것이 비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미다레는 곧 그것이 호리카와의 뒤를 따라오던 다른 남사임을 알아차렸다. 흰 천을 뒤집어쓴 도검남사가 호리카와와 마찬가지로 팔에 빨랫감을 안은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안녕? 미다레의 인사에 잠시 당황한 듯 보이던 남사는 이내 가까이 걸어와 미다레의 앞에 섰다. 사니와가 먼저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야만바기리 씨. 마침 새 남사분을 단도한 참이라."
 "새로운 검인가.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다."

 야만바기리는 눈짓으로 미다레에게 인사를 마친 후 사니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되었네. 짧은 격려에 사니와의 뺨이 금세 상기되는 것을 미다레는 놓치지 않았다. 저 반응은 마치.... 눈치 빠른 미다레는 둘의 관계를 눈치챘지만, 알아챈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사니와에게 들키지 않도록 속으로만 흥흥 웃었을 뿐이다. 호리카와가 빨랫감을 고쳐 안았다.

 "저희도 마침 이쪽으로 가던 차였어요. 괜찮다면, 잠시 동행할게요."

 나머지 안내도 겸해서 말이죠. 붙임성 좋은 미소와 함께 호리카와가 앞장서 걸어갔다. 미다레가 망설임 없이 그 뒤를 따르고 사니와와 야만바기리가 한 걸음 떨어져 따라왔다.

 "겨우 신입이 왔네요. 우리 혼마루는 조금 인원이 부족하거든요."
 "흐음, 몇 명이나 되는데?"
 "스무 명이 조금 넘어요. 출진이나 원정은 어떻게 나갈 수 있긴 하지만."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기에는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미다레를 둘러싸고 대화가 오갔다. 호리카와가 미다레에게 설명하고, 사니와가 호리카와의 말에 보충을 넣고, 야만바기리가 사니와에게 다시 말을 건다. 야만바기리와 호리카와 사이에서는 좀처럼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미다레는 그 둘 사이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저 보아 넘겼다.


3. 

 야만바기리와 호리카와는 사니와와 헤어지자 서로 말없이 빨랫감을 안고 사라졌다. 다음으로 미다레와 사니와를 멈춰 세운 이는 흰 텐구였다. 이마노츠루기는 게다를 신고 솜씨 좋게 복도를 가로질러 사니와의 팔에 매달렸다. 마른 몸이 갑자기 실린 무게에 휘청거렸다가 작은 팔에 기대어 간신히 중심을 되찾았다. 잠시 짧은 환담이 둘 사이에 오갔다. 사니와를 향해 한참을 재재거리던 이마노츠루기는, 한발 늦게 미다레의 존재를 눈치채고 품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복도에 침묵이 흘렀다.

 "새로운 동료?"
 "응. 미다레 토시로라고 해요."

 사니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마노츠루기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흰 텐구는 사니와의 품 안에서 후다닥 뛰쳐나와 미다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 됐다! 난 이마노츠루기.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맞잡은 손이 좌우로 휙휙 흔들렸다. 격한 환대에 살그머니 웃음이 나오려는 순간, 이마노츠루기의 입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주인님은 계속 여기 있어 주시는 거군요! 무언가 물을 틈도 없었다. 이마노츠루기는 다가올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팔짝팔짝 뛰어가 버렸다. 미다레는 이마노츠루기를 부르려다, 곧 그만두고 사니와를 따랐다.


4.
 미다레는 그 외에도 많은 도검남사들을 소개받았다. 모두가 한 마디씩 건넨 말을 종합해보니 미다레는 이 혼마루에서 사니와가 처음으로 단도해낸 검인 듯했다.

 "하지만 다른 검들도 많이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혼마루를 인수했거든요."

 사니와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작게 숨을 들이켰으나, 호흡이 말이 되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미다레는 그 작은 숨소리를 일부러 무시했다.

 사니와는 마지막으로 미다레를 본채에 있는 아와타구치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여기가 아와타구치의 단도들이 지내는 방이에요. 짧은 안내와 함께 사니와가 방문을 열었다. 저들끼리 방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형제들이 미다레를 보고 일순 동작을 멈추었다. 미다레는 방 안의 공기가 조용히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묵이 피부를 콕콕 찔렀다. 곧 야겐이 나와 인사를 건네고, 고코타이가 호랑이를 앞세워 쭈뼛거리며 미다레를 환영하면서 그 분위기는 얇은 얼음이 물에 녹듯 금세 사라졌다. 그러나 미다레는 그 분위기를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1초도 안 되는 정적이 미다레의 가슴 속에 신경 쓰이는 가시로 남았다.


5.
 다음 날 오후. 홈스쿨링 과제를 앞에 두고 낑낑대던 사니와는 인기척을 느끼고 마루로 나갔다. 미다레가 마루 끝에 앉아 골이 난 표정으로 발을 달랑거리고 있었다. 신발 코에 모래가 긁혀 바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사니와는 잠시 과제를 던져두고 미다레에게 다가갔다.

 "아츠시 말이야."

 미다레가 사니와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꺼냈다. 사니와가 채 말을 걸기도 전이었다. 사니와는 미다레의 옆에 걸터앉았다. 미다레는 불만스러운 듯이 발끝을 툭툭 차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니, 야겐도 고코타이도 이치니도! 말을 걸면 딴청 피우고 눈도 마주쳐 주지 않고! 다들 왜 그렇게 나를 피하는 거야?"

 처음에는 평범했던 목소리가 점점 짜증스럽게 높아졌다. 사니와는 어렵지 않게 미다레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와타구치의 검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한 번 그 광경을 상상하자 자연스럽게 조각난 검들, 피가 튀어있던 벽지, 동생에게 검을 치켜들었던 이치고가 꼬리를 물고 기억 위로 떠올랐다.

 "이래서야 미움 받는 것 같잖아."

 미다레의 푸른 눈이 눈물로 얇게 덮였다. 사니와는 입을 뻐끔거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참상을 직접 겪었던 본인이 아닌 만큼, 함부로 말하기가 더 어려웠다. 미다레는 한껏 토라진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사니와는 마루에서 뛰쳐나가기 일보직전인 미다레를 붙잡았다. 아니야.

 "아츠시도 야겐도 모두, 미다레를 미워하지 않아요."

 사니와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사니와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사니와를 빤히 바라보던 미다레는 사니와를 향해 푸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냥 한번 푸념한 걸 가지고.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이래봬도 형제잖아?"

 미다레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잠시 멈추어버린 사니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쓸데없이 진지한 태도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다레는 시원스럽게 별채에서 등을 돌렸다. 뭐, 석연찮은 점은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다음에 또 놀러 올게! 미다레는 사니와에게 작별을 고한 후 다시 본채로 달려가 버렸다. 사니와는 끝까지 그를 붙잡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연필을 들었지만 통 과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6.
 그 다음날, 사니와는 방 안에 주술식을 늘어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되다 만 식신이 사니와의 주변을 둥실둥실 맴돌았다. 해주(解呪)이외의 주술은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다. 불만스런 얼굴로 식신을 거두려던 찰나, 마당에서 직직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사니와는 식신을 내버려 둔 채 마루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츠시가 별채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츠시가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가, 곧 고개를 들어 사니와의 눈을 피했다. 사니와는 굳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마당으로 한 발 내려가 아츠시의 앞에 섰다.

 "미다레랑 무슨 일 있었나요?"




7.
 사니와가 오기 전, 전임이 아직 그의 주인이던 날. 아츠시는 형제를 죽이던 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 주인님이, 전부 죽이면, 이치니만은 봐 주겠다고...! 고코타이의 새된 목소리가 울리고, 다음 순간 아츠시는 본체를 들고 형제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다레는 경계심 없이 방문을 열고 잠옷 차림으로 아츠시를 맞았다. 비명과 선혈. 칼날을 내려칠 때마다 온 몸에 튀던 뜨끈한 감촉. 팔목을 파고들던 손톱. 피가 배어들어 천 배는 더 무겁게 느껴지던 옷. 첫 번째 미다레 토시로를 죽인 후, 아츠시는 말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한 방을 쓰고 있던 고코타이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츠시는 보란 듯이 겉옷을 벗어 던졌다. 피에 젖은 윗도리가 고코타이 앞에 털썩 떨어졌다. 이젠 괜찮아.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하얀 이마에 피가 얼룩졌다.


8.
 넓은 방의 공기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불타고 없는 연련장의 아침 분위기가 이러했다. 마에다와 히라노는 평소 대련할 때와 마찬가지로 방 맞은편에 정좌하고 있었다. 몸 안에 살의와 긴장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자신이 야만스러운 무언가가 된 기분이었다. 히라노가 천천히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칼을 쥔 손을 앞으로 내민 자신을 바라보며 히라노는 연련 때와 다름없는 말투로 말했다.

"아츠시."

하얀 망토 끝에 달린 술이 조용히 흔들렸다. 마에다는 평온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갑니다."

과연 평온한 표정이었을까.


9.
 "잘 지낼 자신이 없어."

 울음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였다.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바지 끝단을 꽉 쥐었다. 미다레 말이야. 그 녀석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알지만. 아츠시는 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잠깐의 정적 후, 끊어버린 말끝에 다른 말꼬리가 붙어 나왔다. 자꾸 생각난단 말이야. 얼굴을 볼 때마다. 다시 침묵. 사니와는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해도 완벽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잠깐의 침묵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대장."

 아츠시는 사니와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피했다. 그 다음은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사람 죽여 본 적 있다고 했지."

 옆에 앉아 있던 사니와가 무섭게 조용해졌다. 아츠시는 말을 꺼내자마자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어질 만큼 후회했다. 수많은 세월을 전란 속에서 보냈던 검의 츠쿠모가미가 하기에는 너무나 머저리 같은 질문이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자고 사니와의 상처를 후벼 파다니. 하지만 이번에도 아츠시의 혀는 그를 배반했다.

 "그거, 잊어버릴 수 있어?"

 대장, 화내지 않을까. 울어버리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뒤늦은 후회가 서서히 발치를 적셨다. 다행히 사니와는 화내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잊어버릴 수 없어요."

 되돌릴 수도 없고요. 담담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사실을 고했다. 사슬과 형틀에서 간신히 벗어났건만, 사니와는 아직도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꿈을 꾼다. 그렇구나. 아츠시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무슨 자격으로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심판해 줄 이는 혼마루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마른 손이 어깨를 감쌌다가, 등을 끌어당겨 아츠시를 품에 안았다. 아츠시는 사니와의 가슴뼈에 머리를 대었다. 사니와는 어색하게 아츠시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10.
 미다레 토시로는 본채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치마가 조금 말려 올라갔다. 사니와와 헤어진 이후 제 나름대로 형제들을 찔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겁에 질린 눈초리와 그것을 억지로 덮어 가리려는 행동뿐이었다. 야겐의 딴청과 고코타이의 말더듬으로 미다레는 그 뒤에 숨겨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형제들이 숨기는 것은 아주 어둡고 불쾌한 종류의 사실일 것이다. 그들의 깨끗한 도신에 지워지지 않는 흠결을 남길 만한 일. 아주 불명예스러워서 같은 도파의 검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 하지만 말이야. 미다레는 옆으로 빙글 돌아누웠다. 이치니까지 딴청 피울 건 없잖아. '형제'니까. 사니와와 헤어진 이후, 미다레는 일부러 아와타구치 도파가 아닌 이들에게는 혼마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캐묻고 다니지 않았다. 미다레는 형제들의 입에서 사실을 듣고 싶었다. 억지로 사실을 덮어 가린 것들을 전부 치워 버리고, 괴로운 진실에 닿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것이 미다레가 현현한 이후 처음 품게 된 인간의 마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울컥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반드시, 자기 입으로 털어놓게 하고 말겠어! 마루에서 벌떡 일어난 미다레의 시야에 마침 이치고가 보였다. 사니와와 하세베와 함께였다. 미다레는 망설임 없이 그 앞으로 달려갔다. 따질 기세 만만으로 허리에 손을 짚고 서자, 세 사람이 동시에 멈추어 미다레를 바라보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겠어."

 사니와가 몸을 살짝 낮추어 미다레와 눈을 맞추었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형에게 볼일이 있어. 미다레가 단호하게 사니와를 제치자 다음은 하세베가 앞으로 나섰다. 주군과의 대화를 방해받은 것이 영 짜증이 난다는 태도였다. 

 "지금은 일로 바쁘다. 방해하지 말고-."

 그 순간 이치고가 팔을 뻗어 하세베를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하세베 공. 이치고의 눈동자가 미다레를 향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반들반들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주군."

 사니와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뒤로 물러났다. 계속 미다레를 이런 분위기 속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사실이었다. 사니와는 이치고가 미다레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떴다. 본채를 떠나면서 흘긋 뒤돌아보자, 이치고가 미다레가 하염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11.
 이치고와 헤어진 후, 미다레는 타박타박 복도를 걸었다. 잔뜩 약이 올라 있는 미다레 앞에서, 이치고는 뜻밖에 담담하게 과거사를 풀어 놓았다. 전 사니와는 좋은 인간이 아니었으며,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 혼마루를 실험장으로 삼아 도검남사들을 타타리가미로 만들려 했다. 아와타구치의 검들끼리 서로 죽이게 하는 것도 그 실험 중의 하나였다. 지금 혼마루에 남아 있는 아와타구치의 단도들은 전부 그 실험에서 살아남은 검들이다. 자신 또한 예외 없이 동생들의 목숨을 볼모로 협박당했다. 전임자가 죽고 싸움이 간신히 소강되었을 때, 지금의 사니와가 와서 우리를 구해 준 것이다.
이치고의 설명은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치고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다레는 그의 말에 토 한번 달지 않았다. 그가 가슴을 찌르고 목소리를 떨게 만드는 단어를 피해 간신히, 간신히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미다레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츠시 토시로는 저번의 미다레 토시로를 죽인 탓에 늘 자신을 피해 다녔다. 미다레 토시로 자신은 한 검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분령(分靈)들 중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저번의 미다레 토시로와 자신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저번의 미다레 토시로이고 지금의 나는 지금의 미다레 토시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머리를 싸쥐고 고민하던 미다레는 누군가와 정면으로 코를 부딪쳤다. 아얏, 하는 단말마가 동시에 복도를 울렸다. 아츠시가 미다레와 똑같이 부딪힌 코를 문지르고 있었다. 미다레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번에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다레는 자신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아츠시의 팔을 꽉 붙잡았다. 아츠시가 말없이 팔을 비틀었다. 미다레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눈치였다.

 "이치니에게서 전부 들었어."

 아츠시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미다레의 손이 부드럽게 팔을 타고 내려와 아츠시의 손을 잡았다. 아츠시는 미다레와 마주서고도 차마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하였다. 푹 숙인 고개 아래로 아츠시가 입술을 짓씹는 것이 보였다. 

 "미안해."

 목 메인 사과가 돌아왔다. 자신이 찔러 죽인 미다레 토시로에 대한 사과가. 미다레는 아츠시의 손을 더 단단히 쥐었다.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나는?"

 아츠시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미다레와 마찬가지로 눈이 빨개져 있었다. 미다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힘주어 물었다.

 "나한테는?"

 저번이 아닌, 이번의 미다레 토시로에게 할 말은? 속눈썹에 고였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부연 시야 사이로 아츠시의 표정이 당황에 물드는 것이 보였다. 미다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아츠시의 손을 잡아끌고, 본채의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와타구치의 방으로 가야지. 문을 열어젖히면 야겐과 고코타이가 놀란 토끼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볼 것이다. 
 전부 억지로라도 끌고 나와서, 다 같이 이치니를 찾아가야겠어. 넷이, 아니 다섯이서 실컷 울고 나면 무언가 나오겠지. 용서할 사람도, 용서받을 사람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도.